남극의 얼음 밑, 생명의 수수께끼를 풀다

남극의 깊은 얼음 밑, 그 누구도 손닿지 않았던 공간에서 지구 생명의 기원을 되짚는 발견이 이뤄졌다. 극지연구소(소장 신형철)는 미국 과학자들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서남극에 위치한 메르세르 빙저호(Subglacial Lake Mercer)에서 수천 년간 외부와 단절된 채 진화해온 새로운 미생물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고 19일 밝혔다.

이 빙저호는 해수면 아래 1,087미터 깊이의 빙하 밑에 위치한 극한 환경으로, 빛과 산소가 거의 없고 영양분도 부족한 상태다. 이곳에서 확보된 시료는 청정 열수시추(hot-water drilling) 기술을 활용해 외부 오염 없이 채취됐으며, 2013년 윌란스 빙저호 탐사 이후 인류가 두 번째로 오염 없는 빙저호 시료 확보에 성공한 사례다.

국제 공동연구팀은 무려 1,374개의 단일세포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 기존 해양 및 지표 미생물과 유전적으로 고립된 종들이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고유의 생존 전략을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핵심 요인은 바로 ‘대사적 유연성’이었다.

018년 12월 빙저호 메르세르 현장탐사 캠프 전경 (Billy Collins, 존 프리스쿠 교수 제공)

극지연구소 황규인 박사는 “이들 미생물은 산소의 농도, 유기물의 접근성에 따라 다양한 대사 경로를 택해 에너지를 확보하는 능력을 진화시켰다”며 “그 유연성이 바로 수천 년을 버틴 생존 메커니즘의 열쇠”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수층에서는 산소를 활용한 대사가 우세했으며, 산소가 부족한 퇴적층에서는 화학독립영양이나 혼합 영양전략을 택하는 등 생태적 차이가 두드러졌다.

연구진은 특히 세계 최초로 빙저호에 단일세포 유전체 분석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 기술은 극소량의 생물량에서도 유전체 수준의 고해상도 분석을 가능케 해, 미지의 생명체 연구에 한 획을 그었다. 2014년 윌란스 빙저호에서 미생물 다양성이 예기치 않게 발견된 이후, 이번 분석은 그 가능성을 한층 더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추공에 열수시추기 투입된 모습과 외부에서의 오염원 유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된 UV 차단막(Billy Collins 사진, 존 프리스쿠 교수 제공)

빙하 밑 생명, 외계 생명 탐사의 열쇠로… “유로파·엔셀라두스 연구에 활용 가능”

이번 성과는 지구 생명체의 진화 과정을 밝히는 데서 더 나아가, 태양계 바깥의 생명 존재 가능성까지 논의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제로 유로파(Europa)와 엔셀라두스(Enceladus)와 같은 얼음으로 뒤덮인 위성들 역시 빙하 아래 액체 바다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번 남극 빙저호의 생명체 발견은 이러한 외계 환경에서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강력한 생물학적 근거로 작용한다.

연구팀은 산소 가용성과 영양 접근성이 미생물 군집의 대사 경로와 구조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임을 확인했다. 빛이 없는 암흑의 세계에서도 생명체는 에너지 획득 전략을 다변화하며 집단의 생존력을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극한의 조건에서도 생명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기능적으로 조직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기도 하다.

수석 과학자 존 프리스쿠, 화학 실험실에서 10L 채수기 운반 (Kathy Kasic 사진, 존 프리스쿠 교수)

이 프로젝트는 미국 과학재단의 지원 아래 추진된 SALSA(Subglacial Antarctic Lake Scientific Acces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극지연구소가 분석을 주도했다. 신형철 소장은 “우리 연구팀의 제안과 미국의 탐사 기술이 만나 세계 최초의 과학적 성과를 거뒀다”며 “남극에는 아직 인류가 접근하지 못한 600개 이상의 빙저호가 남아 있다. 이 미지의 생태계를 밝혀가는 데 극지연이 중심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학계에서도 높은 주목을 받으며, 세계적 과학 저널 Nature Communications에 8월 게재됐다. 생명체의 경계를 다시 그리는 이 연구는 앞으로 빙저호 탐사 기술, 우주생물학, 기후 변화 연구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돼 활용될 전망이다. 남극의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생명이 이제 지구 생물학의 틀을 넘어, 우주 속 생명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탐사의 문을 열고 있다.

More from this stream

Recome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