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아연 지붕은 도시의 미적 상징이자 역사적 자산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19세기 오스만 재개발 시기에 도입된 아연 지붕은 경량성과 가공 용이성, 내구성을 갖춘 소재로서 파리 도심 건물에 널리 채택됐다. 독특한 청회색의 외관은 도시 전역에 일관된 풍경을 제공하며, 많은 예술작품과 영화에서 파리의 정체성인 특유의 ‘스카이라인’을 나타내는 주요 요소로 활용되었다.
폭염 속 문제: 지붕 아래 ‘찜통’이 된 실내
그러나 이처럼 낭만적인 이미지의 아연 지붕이 기후 변화라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이 심화되면서 아연 지붕 아래 거주 환경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금속 재질 특성상 열을 쉽게 흡수하고 내부로 전달하기 때문에, 지붕 바로 아래 공간은 하루 중 기온이 40도를 넘는 일이 잦다. 특히 환기나 냉방 시설이 부족한 오래된 건물의 다락방이나 상층부는 복사열로 인해 하루 종일 더위가 식지 않아 거주자들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런 지붕 아래 공간(chambres de bonne)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보통 저소득층, 학생, 이민자, 노년층 등이다. 고층 상층부의 방들은 역사적으로 하녀나 하급 직원이 쓰던 공간으로, 원래부터 냉방이나 단열이 잘 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실내외 온도 차는 해가 진 후에도 쉽게 해소되지 않으며 열사병, 수면 장애, 만성 피로 등 다양한 문제를 초래한다.
단열 및 차열 해결책
파리 시는 차열 페인트, 반사성 코팅, 녹색 지붕, 태양광 패널 겸용 지붕 등 다양한 대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건축 규제와 문화재 보호 정책 때문에 대규모 변경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부 구역은 외관 변경 자체가 제한되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선이 더딜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기존의 아연 지붕을 유지하면서도 기능을 보완할 수 있는 고반사 코팅 처리, 복층 구조를 통한 단열, 경량 녹색 지붕 도입 등을 현실적인 절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정부는 기후 대응의 일환으로 열에 취약한 건축물에 대한 보조금 지원, 리노베이션 인센티브 확대 등의 정책을 준비 중이다.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아름다운 지붕보다는 실질적인 주거 안전과 쾌적함을 중시하는 여론이 커지고 있으며 미학과 실용성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으려는 사회적 합의가 점차 형성되고 있다.
최근 파리의 기후 건축 스타트업 ‘Roofscapes’는 아연 지붕 위에 목재 플랫폼을 설치한 후 그 위에 녹지(흙과 식생)를 덮는 방식의 새로운 구조물을 시범 도입했다. 이는 금속 지붕이 태양광을 직접 흡수하지 않도록 하고, 자연 기반의 차열 효과를 극대화하는 시스템이다. 이 같은 접근은 기존 건축물의 외형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내부 주거 쾌적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역사 보존 지구처럼 외관 변경이 어려운 지역에서 기술적 타협안을 찾는 데 있어 하나의 모델이 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국에서의 유사 문제 및 배울 점
한국 역시 여름철 강한 일사와 고온다습한 기후 조건으로 인해 지붕 구조물의 단열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오래된 단독주택이나 슬레이트, 칼라강판 등 금속성 지붕을 가진 건물에서는 유사한 폭염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차열 도료, 복층 지붕 구조, 단열 보강재, 녹색 지붕 기술 등을 활용한 실질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정부 차원에서는 고온 위험군 주택에 대한 선제적 개보수 지원과 도시 열섬 현상 완화를 위한 정책 도입이 필요하다. 더불어, 미관과 에너지 효율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지붕 솔루션을 위한 기술 개발과 제도적 뒷받침이 병행되어야 한다. 파리의 아연 지붕이 안고 있는 문제는 단지 유럽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도시가 마주한 공통 과제라는 점에서, 한국 또한 지금부터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야 할 때다.





